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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과잉의 결합, 왜?

지난주 발렌시아가의 2025 가을 컬렉션을 통해 람보르기니와의 협업 제품이 공개됐습니다. 발렌시아가는 지난 10년간 뎀나 바잘리아의 지휘 아래 독창적인 개념을 혁신적으로 구현하며 트렌드를 선도해 온 패션 하우스입니다. 경계를 허무는 컬래버레이션이 새롭지 않을 만큼 잦아진 요즘이지만 프랑스 하이엔드 브랜드와 이탈리아 슈퍼 스포츠카의 전례 없는 만남엔 눈길이 갑니다. 각자의 정체성이 뚜렷한 만큼 하나로로 어우러지기 쉽지 않았을텐데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서로를 찾았던 걸까요?

상징적인 디자인 철학과 감성을 하나로

먼저 공개된 협업 컬렉션의 제품부터. 의류, 가죽 제품, 주얼리, 액세서리로 구성됩니다. 주요 아이템으로는 람보르기니의 두 번째 HPEV(High Performance Electrified Vehicle)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슈퍼 스포츠카인 테메라리오에서 영감을 받은 아트 워크로 꾸며진 오버사이즈 봄버 재킷, 모터스포츠 스타일의 레이싱 가죽 재킷, 티셔츠, 후디, 트롱프뢰유 기법이 적용된 레이어드 셔츠를 꼽을 수 있습니다.

람보르기니의 상징인 방패 실루엣 엠블럼을 적용한 로데오, 아워글래스, 익스플로러, 캐리 백 시리즈와 테메라리오 키 포브에서 착안한 참 장식 및 대시보드 클러치도 있는데요. 마흔 개에 이르는 이번 협업 제품들은 람보르기니 특유의 감성과 기술 미학이 발렌시아가 고유의 스타일 코드로 재해석된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업계에 따르면 브랜드만의 굳건한 아이덴티티를 토대로 구현된 창의성이 돋보인다는 평입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발렌시아가의 실루엣에 람보르기니의 로고를 넣었을 뿐이라는 매너리즘적인 접근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판단은 당신의 몫.

공유와 확장에서 비롯될 시너지

활동하는 분야가 다른 두 브랜드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극단을 달린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2015년 알렉산더 왕을 이어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됐던 뎀나는 해체주의를 토대로 발렌시아가를 재해석하며 힙한 오트 쿠튀르로 탈바꿈시켰죠. 기능적 과장이나나 괴상함으로 요약될 수 있는 그의 탈(脫) 패션화는 일반적인 럭셔리가 아닌 반(反) 럭셔리를 지향하며 MZ 세대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 앞으로 피에파올로 피촐리가 맡을 발렌시아가는 어떤 모습일지 알 순 없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호화스러움을 표방하는 무대에서 발렌시아가만큼 스트리트 무드를 풀어낼 브랜드는 딱히 떠오르지 않네요.

람보르기니 역시 시각적인 과감함이 두드러집니다. 부드러운 선을 통해 우아함을 강조하는 라이벌, 페라리와 비교한다면 극한의 직선이 강조된 람보르기니는 파괴적이죠. 성능 또한 극단을 향해 가고요. 평범보다는 비범을 추구하기에 두 브랜드의 결합은 정체성의 공유를 통한 확장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확장은 새로운 서사를 만드는 데 기여합니다. 이야깃거리와 팔 거리가 생긴다는 거죠.

발렌시아가 그래피티로 커스터마이징 된 람보르기니 레부엘토뿐만 아니라 독일의 조각가 잉베 홀렌의 ‘플래투닝 페이셜 스켈레톤(Platooning Facial Skeleton)’ 시리즈가 파리, 밀라노, 런던 매장에서 전시되며 두 브랜드의 첫 번째 협업을 기념합니다. 참고로 플래투닝 페이셜 스켈레톤은 자동차 부품을 해체하고 재조합해 인간의 두개골을 연상시키는 구조로 구현한 조각 작업인데요. ‘플래투닝(Platooning)’은 군집 주행 기술을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작가는 이를 사람의 신체 중 일부인 ‘페이셜 스켈레톤(Facial skeleton)’과 결합시켜 고도로 조직된 기술 시스템이 인간의 존재 방식에 미치는 영향을 시각적으로 제시한다네요. 이번 에디션에서는 람보르기니 부품을 조형 요소로 활용했다고.

파리, 런던, 상하이 등 일부 매장에는 람보르기니의 디자인 센터, 센트로 스틸레와 함께 만든 베사로의 드라이빙 시뮬레이터도 설치된다고 합니다. 람보르기니 부품이 적용된 고사양 시뮬레이터 장비와 함께 애플 비전 프로 전용 앱을 통한 테메라리오 감상도 가능한데, 발렌시아가 고객이 람보르기니와 보다 깊게 연결될 수 있도록 기획됐다네요. 몰입형 기술을 통해 감각적인 경험을 선사하는 것, 한 마디로 이야기와 체험을 파는 겁니다.

이처럼 두 브랜드의 협업은 제품을 넘어 스토리텔링에 기반한 체험을 통해 SNS 바이럴까지 계산된 콘텐츠입니다. 동시에 ‘소유’보다 ‘보여줌’의 가치가 우선되는 오늘날의 소비 패턴에 맞춰 최적화되어 있는 요즘 마케팅이기도 합니다. 의외의 만남에서 비롯된 실험적인 비주얼은 디지털 공간에서의 공유와 확산 측면에서 매력적이잖아요.

어제 오늘 그리고

발렌시아가는 구찌, 크록스, 아디다스 등 다양한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한 바 있지만, 람보르기니와는 접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발렌시아가는 4~5년 전부터 레이싱 재킷, 드라이빙 글러브 등 모터스포츠 스타일을 차용해왔었죠.

반면 람보르기니는 최근 몇 년간 페라리, 포르쉐, 메르세데스-벤츠 등 럭셔리 자동차 제조사들이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이 활발했던 상황에서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에 신중한 입장을 고수했었습니다. 이번에 발렌시아가를 패션 브랜드와의 첫 번째 컬래버레이션 파트너로 삼아 브랜드의 문화적 위상을 재고하게 됐습니다. 신선함도 더하면서 더 많은 이들에게 닿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도 했고. 발렌시아가 또한 대중적인 재미를 강조했던 지난 컬래버레이션과 달리 호화스럽고 과잉된 시각적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는 적합한 파트너를 만난 거고요. 게다가 2025년 가을 컬렉션의 테마가 공간, 속도, 실루엣이라는 점에서 람보르기니만의 고유한 조형은 이를 한층 돋보이게 합니다.

이번 협업을 두고 전략적인 전환점이자 문화적 실험이라는 평가와 함께 저렴한 굿즈 같다는 비판이 교차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고 새로운 고객을 유입하는 데에는 분명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패션과 자동차라는 경계를 허물고 각자의 영역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주었다는 점에선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창출한 사례라 칭할만합니다. 미래에는 슈퍼카가 런웨이에 설 수도 있고 패션 하우스 장인의 감각과 기술이 자동차에 더 깊게 스며들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이번 협업은 패션이 품은 엔진 혹은 엔진으로 꽃피운 패션의 시작점으로 회자될지도.

글 이순민
사진 Lamborghini MEDIA CENTER

이순민

이순민

royalblue@encar.com

Power is nothing without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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